[신앙컬럼] “왜 용서를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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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장 하려고 하지 않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가장 힘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 역시 용서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할 줄 모르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 또한 용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첫 번째 말씀이 바로 용서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4) 인간은 마지막까지 하기 힘든 그 용서를 주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셔서 제일 먼저 행하셨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피하고자 하는 그 용서를 십자가의 견디기 어려운 그 고통 가운데서 행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용서라는 단어는 매우 익숙하게 다가오지만, 익숙한 만큼 그렇게 친숙하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것은 바로 용서의 주체에 대해서 매우 편협하며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타인으로부터 나는 늘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로 여기지만, 내 입장에서는 타인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 자주 회자되는 말이 있습니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우리는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말이 유행어처럼 돌고 있는 걸까요? 분명 모든 기준이 공정하여 어떤 진영에 속해있던지간에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잣대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자기 중심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시대가 몰고온 결과가 아닐까요? 이런 세태를 보면서 30년전에(1989년) 천주교의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내 탓이오’ 캠페인이 불현듯 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이유가 뭘까요? 그 때 고 김수환 추기경이 이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차량에 ‘내 탓이오’ 스티커를 손수 붙이고 다니는 등 이 캠페인의 확산에 적극 동참하면서 “자기반성 없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순 없다”고 강조함으로 당시 정치권이나 사회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30년이 지난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이 캠페인의 영향이 우리의 뼈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볼때 왠지 씁쓸한 생각이 천근 만근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정치권을 비롯해서 사회 전반적인 부분이 30년 전이나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결국 자기 반성의 ‘내 탓이오’ 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대변해 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공동체는 세상의 분위기와 견주어볼 때 탁월하게 차별화될 정도의 강한 임팩트를 주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더욱 더 얼굴을 들지 못하는 형편이다 보니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너희는 나의 거룩한 백성이요, 자녀의 권세를 허락하신 우리 하나님을 너무나도 멋쩍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가르침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인데, 우리는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는 것이 문제의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 돌리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에 익숙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에 발광하는 우리를 보면서 책망하시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상황에 비추어볼 때 어떻게 용서라는 명함을 감히 내밀 수가 있겠습니까? 남탓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용서를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니까 용서를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남탓’하는 병에 걸려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의 심판을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셨습니다.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우리의 죄때문에 그 고통을 당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죄사함의 용서를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우리를 향한 용서의 탄원을 간절하게 요청한 것은 또한 우리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사랑때문에 아무런 조건없이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남탓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단지 용서의 묵상이 아니라 용서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명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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