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코미디언에서 진정성 있는 리더로 급부상

76

대통령에 당선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정치 경험이 전무한 코미디언 출신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최근 진정성 있는 전쟁 지도자로 떠올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직접 촬영한 자신이 나오는 영상과 연설 영상을 통해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노와 러시아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칭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집단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거나 우크라이나를 “비나치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황당한 언사를 쏟아내고 있다.

반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젤렌스키 대통령은 여전히 위엄을 잃지 않으며 단호하며 분명한 태도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이런 행보는 많은 지식인과 비평가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이다.

지난 24일(현지시간) 새벽을 기점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여론조사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맡은 자리가 버거워 보이는 리더에서 우크라이나의 선봉장으로 탈바꿈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몇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SNS에 올린 연설에서 엄숙한 목소리로 전쟁을 막기 위해 푸틴 대통령에게 통화를 시도했으나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다고 전했다.

어두운 옷차림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지도 앞에 서서 양국은 “냉전도, 열전(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쟁)도, 하이브리드 전쟁도” 모두 필요 없다며 전쟁의 불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침공 시 우리는 등을 보이며 도망가는 대신 얼굴을 들고 맞설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인들은 조국을 지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곧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됐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반영하듯, 젤렌스키 대통령은 공개된 영상에서 대낮에 군복 차림이었다. 같은 날 저녁 올린 연설 영상에서 그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 않으면 내일 “전쟁이 당신들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며 서방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경고했다.

“이것은 새로운 철의 장막이 내려와 러시아가 문명 세계로부터 고립되는 소리입니다.”

우크라이나 언론사인 노보예 브레먀의 율리아 맥거피 편집장은 지난 2019년 4월 젤렌스키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그가 정부를 이끌 지도력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우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한 주 동안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자신들의 대통령에게 호의적인 태도로 빠르게 돌아섰다고 맥거피 편집장은 전했다.

“제 생각엔 러시아가 침공을 시작한 후부터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폭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우크라이나 국민이 그를 중심으로 단단히 결속됐습니다. 그는 솔선수범해서 단결력을 끌어내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푸틴의 군대를 물리치고 있는 정부를 이끄는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칭찬과 존경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치 입문은 현실이 예술작품을 따라간 사례다. 그는 인기 TV 드라마 ‘국민의 종’에 출연한 코미디언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그가 연기한 주인공은 평범한 학교 선생님으로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비난했는데, 우연히 이 모습을 찍은 동영상이 SNS를 통해 인기를 끌면서 결국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다.

그의 2019년 대선 출마는 처음엔 장난처럼 여겨졌다. 당시 젤렌스키 후보의 정당은 ‘국민의 종 당’이었다. 그러나 그는 득표율 73%를 기록하며 당선됐으며,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동부 분쟁 지역에 평화를 이룩하겠다고 약속했다.

우크라이나의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인 야리나 클류츠코프스카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막강한 힘이 있지만, 이러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게다가 취임 당시 이렇게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그에게 남은 일은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클류츠코프스카는 “이러한 광범위한 약속을 하는 것과 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별개”라고 전했다.

line

정치 입문 전

  • 1978년, 우크라이나 중부 크리비리흐에서 출생
  • 키예프 국립 경제 대학교에서 법학 전공
  • 인기 TV 프로그램 제작사 공동 설립
  • 논란이 있는 억만장자 이고르 콜로모이스키가 소유한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제작
  • 콜로모이스키는 후에 젤렌스키의 대선 활동 지원
  • 2010년대 중반까지 TV와 영화계에서 활발한 활동
line

젤렌스키는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금융 재벌 이고르 콜로모이스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이 사기 및 돈세탁 혐의로 조사하고 있는 이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의 꼭두각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그러나 그는 회의론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독립적인 행보를 보였다. 예를 들어, 콜로모이스키가 자신의 소유였다가 국유화된 은행인 프리바트 방크를 돌려달라 했으나 은행의 재사유화를 거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에 여전히 부정부패가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며, 새롭게 제정된 반올리가르히 법이 일부 올리가르히들만 제한한다는 한계점도 지적됐다. 서방 세계의 전문가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최대 라이벌인 페트로 포로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향한 부패 혐의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해석한다.

또한 현재까지 14000여 명이 사망한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분쟁의 해법을 찾기 위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에 협상을 시도한 것도 제한적인 성과에 그쳤다. 포로 교환과 평화 협정의 일부 내용을 이행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럴듯한 돌파구는 없었다. 이에 그의 지지율은 2020년 내내 지속해서 하락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후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더욱 강경히 추진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클류츠코프스카는 최근까지도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동부지역 분쟁과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한 접근 방식이 너무 소심하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전쟁의 북소리가 커져가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평화의 날을 선포했고, 접경지역에 휴전 협정 위반사례가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에도 그는 외교적 해법에 대한 희망을 계속 강조했다.

클류츠코프스카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전투 등 그 어떤 군사적인 주제도 피했다. 그런 것들은 그가 잘 알거나 편안하게 느끼는 주제도 아니었다. 그는 대중 연설 시 이런 주제를 피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하루가 멀다고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경고했으나, 미국의 이런 전략이 “우크라이나엔 너무 큰 희생”을 부른다며 거리를 뒀다.

클류츠코프스카는 2월 19일 뮌헨 안보 회의에서의 연설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회의론자에서 지지자로 돌아섰다고 말했다. 이 연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며칠 전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동부 지역의 한 유치원을 방문한 경험을 시작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학교 운동장에 폭탄으로 구덩이가 생겼을 때 아이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세계가 지난 20세기의 실수와 교훈을 잊을 것인가요?’라고요.”

그러면서 그는 서방의 외교 및 국방 지도부에게 “무관심이 여러분을 공범으로 만든다”면서, 정확히 15년 전 바로 이 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거부하며 러시아의 부활을 주장한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세계는 이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유화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클류츠코프스카는 서방 국가에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한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없었다고 전했다.

맥거피 편집장은 “개인적으로 뮌헨 안보 회의에서의 이 훌륭한 연설로 젤렌스키 대통령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면서 “당시 젤렌스키의 많은 정적들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서방의 정보 당국은 러시아의 제거 대상 1순위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름을 올렸다고 주장했다. 그의 가족들이 2순위라고 말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는다고 밝혔다.

그는 직접 촬영해 올린 영상에서 자신이 우크라이나에 남아있음을 확인시켰다. 그는 영상에서 이국적인 동물과 사냥 장면을 묘사한 외벽 장식의 고로데츠키 하우스 앞에 서있는데, 이는 수도 키예프의 대통령궁 맞은편에 위치한 건물이다.

그의 이런 행보에 대해 영국의 작가 벤 유다는 “만약 페일 지역(러시아 제국 시절 유대인 지정 거주지)에 살던 우리 선조들에게 유대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고 있다고 하면, 그분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릴 것”이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클류츠코프스카는 “물론 그는 배우다. 이것이 그의 진짜 모습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면서도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든 간에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젤렌스키의 보좌진은 마침내 제 궤도를 찾았다. 각본가 등 쇼비즈니스 출신들이긴 하지만 하다못해 넷플릭스의 각본을 쓰는 것은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는 것과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열세다. 러시아군은 규모도 크고 단단히 무장 상태다. 그러나 법학과 출신의 정치신인인 44세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계속 목소리를 내며 우크라이나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맥거피 편집장은 “가까운 지인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용기가 갑자기 우주만큼 커졌다’고 썼는데 정말로 그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BBC